이 책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대학생 때이다. 한 전공수업 교수님이 서평과제를 내어주면서 이 책을 소개했던 것이 기억난다. 당시 나는 졸업반이었고, 취업에 대한 걱정으로 사실 이 책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었다. 지금에야 와서 기억나 제대로 읽어보니, 살짝 현학적인 듯 어려운 줄리언 반스의 문체에서 독특한 매력을 느낄 수 있었고, 비교적 짧은 분량에서 휘몰아치듯 흘러가는 스토리라인에 흠뻑 빠져들어 단숨에 읽어내고 말았다. 그리고 책을 내려놓았을 때, 나는 구글을 켜서 도대체 내가 방금 읽은 결말이 무슨 의미인지 찾아볼 수밖에 없었다.
이 소설의 화자인 앤서니는, 독자 입장에서 혼란만을 가중시키는 매우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이다. 1부에서는 스스로의 기억의 한계에 대해서 솔직하게 인정하면서도 비교적 분명하게 그의 학창 시절에 대해, 인상깊었던 수업에 대해, 그의 친구들, 그리고 그가 선망하던 에이드리안에 대해서 서술한다. 젊은 시절, 그를 혼란스럽게 했던 사랑과 우정, 상실을 거쳐 지금은 노년에 접어든 그는, 비록 아내와 이혼을 했으나 비교적 평온한 삶은 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역사에 대해서 어느정도 명료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내가 어떤 인간인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앞으로 부쳐진, 전 여자친구의 어머니로부터 온 편지로 인해서, 그 모든 기억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이 소설은 다양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누군가는 작가가 섬세하고 촘촘하게 설계하고 연출해 둔 서스펜스와 마침내 결말에서 밝혀지는 충격적인 사실에 주목을 할 것이다. 누군가는 작가가 마지막의 극적 결말을 위해 의도적으로 느슨하고 현학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문체에 주목할 것이다. 누군가는 데미안과 싱클레어의 관계를 연상시키는 에이드리안과 앤서니의 관계에, 혹은 앤서니와 전 여자친구와의 관계에 주목할 것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할 점은 나는 문학을 전공하지 않았으며, 내 전공은 경제학이라는 점이다.
경제학 중에서도 계량경제학은 상관관계와 인과관계를 탐색하는 분야이다. 이 책에서 비극적인 사건에 처한 에이드리안이 적어놓은 노트에는 계량경제학 수업 시간에서 볼듯한 수식과 유사한 수식이 적혀있다. 그는 인간관계를 수학공식이나 논리식으로 표현하고 싶어했다. 그가 표현한 "축적"(원래 영어표현이 무엇이었을지 사뭇 궁금하다. accumulation?)이란 경제학적으로는 일종의 gross effect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었고, 한 인간의 운명을 특정 방향으로 끌고 간 인과관계를 공식화 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학부시절에 계량경제학을 공부할 때는, 그저 통계학적이고 수학적인 학문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류의 접근이 좀 더 강조되던 시기였던 것 같다. 하지만 돌이켜보았을 때, 그리고 이 책을 추천해 주신 당시 교수님의 의도를 진지하게 유추해본다면, 계량경제학이라는 방법론에는 훨씬 깊은 의미와 사유가 내포되어있다. 어느 정도까지 변수를 포함시켜야 하는가, 한 설명변수와 다른 설명변수간에는 내가 미쳐 파악하지 못한 다른 관계가 존재하지는 않는가, 상관관계가 아니라 분명한 인과관계라고 어디까지 확신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인간관계 속에서 한 인물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다면, 다른 인물은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가.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의 가장 말미에 나오는 문장은 작가가 도달한 결론이며, 내가 항상 생각해오던 결말과도 동일하다.
"거기엔 축적이 있다.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너머에 혼란이 있다. 거대한 혼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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